유키무라 세이이치. 분실, 열쇠, 너구리
13.12.09
언젠가의 산다이바나시.
테니스의 왕자 유키무라 세이이치 드림.
분실, 열쇠, 너구리
디폴트 네임, 아마노 테루.
사건은 아마노가 유키무라를 피하기 시작한 날부터 시작되었다.
“테루-”
U-17 합숙에서 기말고사를 위해 돌아온 유키무라가 첫날 시험을 끝내고 아마노를 찾아 F반으로 갔을 때 반에 있는 사람은 야나기뿐이었다.
“야나기, 테루는?”
“종례 마치고 바로 가방 들고 뛰어 나갔다만...”
C반의 종례는 보통 조금 긴 편이었다. 그래도 아마노는 늘 반에서 가방을 챙기면서 기다렸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먼저 가다니. 유키무라는 조금 의아했지만 바쁜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야나기와 교실을 나섰다. 같이 공부하기로 한 레귤러들과 점심을 먹으며 왜 먼저 갔냐고 메일을 보냈더니 친구와 시험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다고 답이 와서 내일은 얼굴이라도 보자고 답장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시험 둘째 날도, 셋째 날도 F반에 오면 있는 것은 야나기뿐. 둘째 날에는 오늘도 먼저 갔다만, 이라고 대답했던 야나기도 셋째 날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메일을 보내도 오는 답은 [미안- 약속 때문에.]라는 변명뿐이라 아마노가 유키무라를 피한다는 걸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렌지.”
“왜 그러나, 세이이...치”
야나기가 유키무라를 보고 움찔했다. 뒤에서 푸른 아우라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는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세이이치가 상당히 화가 났을 확률 100%...’ 야나기는 속으로 확신에 찬 데이터를 읊었다. 오늘 이런 상태의 유키무라와 공부해야 하는 마지막 날 영어시험을 남겨둔 키리하라와 수학시험을 남겨둔 마루이의 명복을 빌면서.
“내일, 시험 끝나고는 테루를 좀 붙잡아둬 줄래?”
내일 아마노를 잡지 못한다면 내가 살아남지 못할 확률 99.9%... 야나기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기간 동안 다들 수고했다. 내일은 학교 쉬니까 모레 보자.”
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지난 삼일과 마찬가지로 가채점은 신경도 안 쓰고 가방을 싼 아마노가 종례의 마침과 함께 뛰쳐나가려던 찰나, 야나기에게 붙잡혔다.
“야, 야나기군?”
“세이이치가 할 말이 있다더군.”
아마노는 잡힌 손을 보며 당황해서 야나기의 이름을 불렀으나 야나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마노를 배려했는지 잡은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손을 빼내려고 하면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줬기 때문에 빼낼 수가 없었다.
“저기 야나기군. 나, 가봐야 하는데.”
“시험도 끝났는데 뭐가 그렇게 바쁜 거야, 테루?”
두 사람이 실랑이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때 뒷문에서 유키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나기는 그제야 아마노의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아마노는 오늘은 도망갈 수 없음을 알았다.
“세, 세이이치...”
“우선 나가서 얘기하자. 오늘 시간, 괜찮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마노가 시선을 돌려보니 반에서 가채점을 하거나 짐을 싸던 학우들의 시선이 죄다 본인들에게 몰려있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소동이 벌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며 속으로 한숨을 쉰 아마노는 살짝 끄덕였다. 유키무라는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아마노의 손을 잡고 교실을 나섰다.
“그래서, 왜야?”
“....뭐가.”
나란히 손을 잡고 카페로 온 두 사람은 음료부터 시킨 뒤 자리에 앉았다. 마침 점심 무렵이라 유키무라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으나 아마노가 고개를 저어 마루이가 추천했던 카페는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 한적한 편이었다. 음료가 나오기 전까지 유지되던 정적은 음료가 나오자 유키무라가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면서 깨졌다. 아마노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동안 나 피한 이유.”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피하지 않았어.’라는 대답은 통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시험 기간 중에도 잽싸게 도망갔지만 오늘은 야나기와 실랑이를 하면서 먼저 가려던 모습을 명백하게 보여 버렸으니까. 하지만 대답할 수도 없어서 아마노는 시선을 아래로 깐 채 조용히 입만 우물거렸다.
“이제 나 다시 합숙소로 가야 한다는 거 알잖아. 그러면 또 못 보는데, 이렇게 헤어질 거야?”
‘헤어진다.’는 말의 의미가 이별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화가 섞여 있는 단호한 목소리에 아마노는 고개를 번쩍 들어 유키무라를 바라봤다. 터질 것 같은 눈물을 눌러 참은 것 마냥 눈은 젖어있었다. 유키무라는 당황했다. 갑자기 아마노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U-17 합숙에 들어간 바람에 몇 주 째 제대로 못 만나고 있기는 했으나 시간이 나는 대로 연락도 했으며 그때마다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시험 일주일 전 무렵부터 공부한다고 통화가 안 되기는 했지만, 그때도 메일은 꼬박꼬박했다.
“...무슨 일 있어?”
유키무라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마노는 푸르르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아마노는 본인 앞의 컵에 꽂혀 있는 빨대에 시선을 고정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세이이치가 준 열쇠... 잃어버렸어.”
한참 뜸을 들이고 말한 것은 그것이었다. 유키무라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열쇠? 무슨 열쇠를 말하는 거지? 그리고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합숙 전에 맡기고 갔던 부실 라커룸 열쇠였다.
“내 라커룸 열쇠?”
유키무라가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묻자 아마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노가 설명한 자초지종이란 이런 것이었다. 유키무라가 합숙 전에 맡기고 간 열쇠에 일전에 커플로 맞췄던 작은 너구리 인형을 달고 매일 가지고 다녔는데 언제 떨어트렸는지 시험 일주일쯤 전부터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시험 일주일 전이면 운동부의 부활동이 금지되는 시기라 부실에 사람이 없게 되니까 가끔 가서 슬쩍 봤는데 문이 열린 거 같진 않지만 유키무라에게 받은 두 개를 동시에 잃어버려서 계속 찾았는데도 열쇠는 찾을 수 없었다. 시험 때문에 합숙에서 돌아오면 라커룸 열쇠의 행방을 물을 것 같아서 마주치지 않게 피하면서 열쇠를 계속 찾고 있었다는 얘기까지 마치자 중간부터 웃음을 눌러 참던 유키무라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 삼 일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전전긍긍했더니 이런 귀여운 아마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아마노는 유키무라가 웃는 것이 불만인지 뚱하니 쳐다보다가 시선을 컵으로 내렸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괜찮아.”
한참을 시원하게 웃던 유키무라의 웃음이 멈추고 유키무라는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자물쇠는 끊어버리고 새로 맞추면 되고, 커플 인형은 하나 새로 맞추자. 나는 테루가 내가 맡긴 물건을 그렇게 열심히 찾아줬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쁘니까.”
유키무라는 그렇게 말하고 아마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노는 빨대를 입에 물고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차라리 일찍 말할걸, 손해 봤다. 라는 표정이 훤히 읽혀서 유키무라는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테루가 나 피해 다니는 바람에 그동안 얼굴도 제대로 못 봤으니까 돌아가기 전에 하루 남은 내일은 종일 나랑 같이 있는 걸로? 물론 오늘도.”
아마노가 여전히 빨대를 입에 문 채, 하지만 후련한지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배가 고프다며 작게 투정하는 아마노와 그런 아마노가 귀여운 유키무라는 나란히 손을 맞잡고 카페를 나왔다. 겨울의 찬바람이 조금 상쾌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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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스트 받은 세 가지 소재가 들어가도록 짧은 글을 쓰는 산다이바나시...
한때 열심히 썼었네요(아련) 5년 전 글쯤 가니 이제 걍 남의 글 같고(사실 안 읽음)